서프라이즈~! 이번에 2개 포스트들을 한날에 업로드했습니당~! ‘어! 이럴 수가!’ 생각하고 있는 거죠?…근데 이런 일이 다시 없을 거니까 기대하지마. 자, 시작!
제목의 의미를 알고 있는 사람 손 들어봐!
…
손 내려, 이 새끼들아! 어디서 거짓말하는 거냐?!?
좀 전에 제가 왜 이 블로그를 정기적임이나 시간의 흐름을 아예 고려하지 않으며 익명으로 쓰는지를 공유하고자 하는 느낌이 들었더니 이번에 그렇게 하겠네요.
경고: 이 포스트가 좀 어두워질 거예요.
우선, 나 시간이 없삼! 환언하면, 제가 가난해요…아~주 가난한단 말이에요. 너무 가난해서 “후진국”의 계층에 따르면 제가 상류층에도 미치지 못 한단 말이에요. (물론, 더 가볍게 웃기에 좋은 농담을 썼을 수 있었겠지만, 저는 그런 가벼운 사람은 아니거든요! 절개가 있으니까 제 농담까지도 사람들을 깊게 생각하게 만들어야 돼요. …독창적인 선택이었으니 이 선택을 고수한다, 이놈들아!) 있잖아요, 당신 퇴폐적인 사람들과 달리, 제가 아무것에 환상을 가지지 않고, 나르시시즘도 없고, 그리고 또, 모르는 사람들, 가족들, 친구들이나 아무나의 인정이나 승인을 받아야 하는 위선자가 아니에요. 그래서, 이렇게 건강과 웰빙을 무엇보다 지켜야 하면서 사는 게 많거나 중간양 정도의 돈을 벌어들이지 않죠. 게다가, 저한테는 금기가 된 주제나 사람이 없으니까 이 블로그 내용을 쓰게 돈을 내는 사람이 없을 걸…아니면…? 그런 피학성애자가…있나요…혹시? 있으면 알려주시고 기부하실 수 있게 제가 기꺼이 기부 버턴을 설치하겠습니다!
…그게 농담은 아닌데요.
아무튼, 있잖아, 어딜 감히 누군가가 전능하신 하나님 (즉, White Massa, 백인 맛사)을 최우선하지 않거나, 백인 맛사는 자기가 진짜 무능한 사기꾼이라는 사실이 폭로되어 사회에서 무관함과 소외를 당하는 것을 두려워하는 마음에서 모든 사람들과 모든 것을 지배/장악하고 조종해야 하는 강박적인 충동이라는 것보다 자기 자신의 건강을 우선적으로 챙기겠으나?!! 세상이 이러기 때문에 제 수입원은 많은 시간을 요구하며 상대적으로 받는 돈이 아주 적네요…아~, 가난함. 그래서, 제 드물고 많지 않은 여가 시간에 제가 가진 인류에 대한 의견이 틀렸다는 것을 증명할 수 있으며 인터넷을 접속할 수 있는 한 사람이라도 찾고 있게 돼요 (**즉, 지식이라면 접근함이 특전이나 특원으로 만드는 것이 옳지 않고 싸가지 없는다고 믿으니까 백인 맛사의 사디스트적이고 파괴적인 규칙들에 매이지 않게, 저에게만 있는 고유의 역량을 써 건강이 더 나아져지게 만들도록 더 자립적이고 독립자존적인 사람을 양성시키는 기술들과 지식을 계속적으로 습득하면서 이를 똑같이 성실하고 순수하게 원하는 다른 사람들을 찾아서 돕게 될 수 있는 계획을 세워 시행하려는 중이에요—쉽게 말하면 글로벌 비영리민간단체. 이 설명은 뚜렷하지 않다는 것을 알아요**). 그런데도, 안타깝게도 그런 사람을 아직 찾지 못하고 있어요. 예상 밖에 아니었지만 아직 실망스럽네요.
…뒈져라, 이 지랄을 다하고 있는 오로지 자기 잇속만을 챙기는 개인적인 안건을 가지고 있는 게이트키퍼 (gatekeeper) 개새끼들아! (머릿속에서 주먹을 힘차게 흔들고 있어요.)
어~쨌든!
그리고, 왜 굳이 익명으로 쓰겠다는 주요하고 가장 포괄적인 이유가 있어요. 쉽게 말하면, 전 굉장히, 아~주 많은 것에 대해 굉장히, 아~주 많은 것을 알고 있으며 제가 태어나기 전에도 살던, 제가 죽은 후에도 살 누구보다 인류와 관련된의 모든 것을 이해해요 (이 포스트가 이 블로그의 도입이 되어 있다면 당연히 이런 말은 말도 안 되게 터무니없는 말처럼 읽히겠네요. 그런 사정이므로 당신이 제 말을 의심하게 만드는 무지를 용서할 수 있습니다). 대체 이게 무슨 말이냐 하는 사람들을 위해 빙산의 읽각 은유를 쓸게요. 온 빙산이 제가 지금 의식적으로 가지고 있는 모든 것에 대한 지식이라면, 여태껏 물 표면 위에서 빙산의 일각을 먼 언뜻 보는 모든 사람들은 사실상 임상적 광기에 빠져서 자살을 했거나, 심각한 약물 중독자가 됐거나, (의도적이나 “의외적”) 약물 과다복용으로 사망했거나, 죽었을 때까지 어떤 국영 시설에서 무슨 의사가 처방하는 약 먹기로 초래되는 지속되는 멍하고 무관심한 상태에서 살게 됐거나, 광적으로 폭발해서 광란의 연쇄살인을 저질렀어요.
과장된 말은 아닙나다. 내 인생인데 니가 뭘 알아?!?! …그리고, 이렇게 이런 신비를 유지하고 말거야! #MeToo (미투), My body, my choice (내 몸, 내 선택)!
아무튼, 화제로 돌아가서…사회적인 구성인 돈이 아무리 많아도 결코 유명인이 되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고, 결코 유명인이 되는 것이 괜찮겠다고 생각하지 않을 거예요. 그래서, 무엇이 되든, 누가 뭘 하든,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누군가의 컬트 (사이비) 교주나 무기/도구, 개인 인생 코치, 신, 아이돌, 우상이나, 또, 아무거나 뭐가 두려워서 자기의 인생에 대한 모든 책임을 기피하는 것에 도움을 줄 수 있거나, 자기의 행위에 대한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전가하는 것에 도움을 줄 수 있는 인간들이 동물 (인류가 포함)한테나 물건에 정하는 칭호까지 포함, 절대로 되지 않을 거예요. 있잖아요, 당신들은 기본적으로 이 세상에서 2종료의 사람들만 있다고 믿죠: 지도자들과 추종자들. 저는 중학교 때 제가 추종자가 아니다는 걸 알아차렸고요. 그렇지만, 한참이 지났었어야 제가 지도자도 아니다는 걸 알아차렸어요. 전 은둔자이다!…종교 (당연히)와 그 천편일률적인 고약한 체취 없기. 제 몸에서 보통도 평균 이상도의 인간 후각 기관이 의식적으로 감지할 수 있는 냄새가 나지 않은데요. 이 말은 제 몸에서 아무 냄새도 나지 않다는 아주 직설적이고 장황한 표현 방식이었지요. 당신들 중에 그런 정보가 궁금하시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으셨겠더니…고맙다고 안 하셔도 돼, 별일 아니었으니까. 아무튼, 당신 아주 조끔만 자제력이 있거나 자제력이 전혀 없는, “자멸적인 행동이면 적당한 정도가 있는 뿐만 아니라 적당한 자멸적인 행동이 웰빙에 좋다!”고 생각하는 인간들한테는 도착[倒錯]된 동물/물건을 우상으로 떠받들고 싶은 지독한 원초적인 충동이 있으니까 저에도 관해서라면 그런 충동을 참을 수 없겠다는 것을 잘 알고 있어요. 근데, 높이 받들어진 사람들의 현실 생활은 “보통”의 사람들 (특히 취약한 사람들)의 현실 생활과는 크게 동떨어져 있으니까 저는 극도로 그런 사람을 대고 받들어 모시는 꼴도 보기 싫고 증오하고 미워하고 사갈시하고 질색하고…모든 다른 한국어에 포함되는 유의어까지도. 그래, 보통보다 약간 높은 지위이면 취약한 사람들을 더 효과적으로 지원할 수 있겠지만, 시간이 지나갈수록 그 원래 순수한 (제일 이상적인 경우) 사람들을 지원하고 싶은 열정이 “구세주 컴플렉스”를 불러오기 시작해요. 그래서, 지원을 받았던 사람들한테 감사를 받고 받을수록, 또, 다른 사람들한테 칭찬을 더 많이 받을수록, 구세주 컴플렉스가 점점 더 심해져 ‘더 많은 사람들을 구제해야 한다’는 생각에 더 높은 지위를 추구하고 더 많은 사람들이 관여해지기 돼요. 하면서, 취약한 사람들이 정말로 필요로 하는 것이 덜 중요해지고 “지원”을 하는 게 점점 더 복잡해지고 어려워지다 보니까 덜 효율적이 돼요—그 “지원”이 이제 본인의 개인적인 안건만 아니고 많은 사람들의 개인적인 안건들에 걸려 있게 되었으니까. 그것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본인을 떠받드는 거니까 다른 사람들이 마음대로 한 순간에 본인을 깍아내릴 수 있죠. 그래서, 무슨 일이 있어도 제가 결코, 절대로, 그런 권력을 다른 사람에게 넘겨주지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저라면 그런 높은 지위에 있지 않아도 취약한 사람들의 현실 생활을 알아볼 수 있어요…저한테는 인터넷과 어떤… 뭐라고 말할 수 없는 타고난…자질이 있으니까. 그렇기 때문에 이것을 세상에 분명히 내놓고 싶다: 제가 사람이고 저를 우상으로 떠받들어 모시는 게 너~무 싫어서 만약 누군가가 그런 짓을 해보려고 시도만 해보면 (비유적으로) 제가 그 높은 위치에서 지급히 자진해서 뛰어내릴 거고, 모든 관련된 사람들이 그런 일로 인해 큰 대가가 호되게 치르게 될 거예요—폭력이나 예상/예측할 수 있는 식으로 안 할 건데…저한테는 아무나 모방할 수 없는 특유의 방식이 있단 말임, 나 쏘중하고 뜩별하다니깜. …왜요? 우리 엄마가 매일 내가 소중하고 특별한다고 하시는데요! 흠,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부분은 농담이죠…아니, 반농담이다…아니, 농담이 아니고…? 농담이다 생각하든 말든 진짜로 농담인지를 알아보는 것을 권고하지 않아요.
영어판에 여기서 특별히 흑인들한테 과거와 관련된 아주 중요한 메시지를 전하기 시작했지만 이 메시지는 흑인이 아닌 사람들도 읽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해요.
모든 흑인들 중에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다른 사람을 자기를 대고 우상으로 떠받드는 것에 대한 아주 뿌리 깊은 심한 혐오증을 무의식적으로 가지고 있어요. 유발하는 이유가 너무 복잡하니까 나중에(?) 말하도록 하겠는데요. 이번에 제가 이전의 포스트에 업근했듯이 흑인들의 더 높은 유전적 다양성 덕분에 흑인들한테는 다른 사람들보다 이 자유적인 상태에서의 행성에 더 효율적으로 창성하게 살 수 있는 본능, 실력, 특성들, 등이 있고요 (인종주의가 아니다…현실이고 사실이고 과학이니까 입 닥쳐). 몇 천년부터 쿠시 왕국이 무너뜨려졌을 때까지 쯤 흑인들이, 요약하자면, 어느 점으로 보아도 흑인이 아닌 사람들이 흑인들을 공공연히 또 의식적으로 신으로 여겼어요 (그 글씨를 굵게 쓰는 이유가 있다. 말하는 대로, 설명이 아주 복잡하니까 나중에 이에 대한 포스트를 쓰려고…아마). 이유는 흑인들이 자기가 그 때까지 본 적이 없는 것이나 자기 자신이 못 할 수 있는 것을 할 수 있었어요. 이런 흑인이 아닌 사람들 (특히 그 아무것도 제공할 수 없고 유용한 지식이 거의 없는 누구보다 특별하게 한심스럽게 자포자기한 백인들)은 흑인들한테서 관심/인정/동의/승인을 갈구하고 있었거나 아무나 흑인을 보고 어떤 도움을 줘 달라고 하곤 했고—예를 들어: 철학, 천문학, 의술이나 점성학에 대한 지식도 기술/공학/공사까지. 물론, 이런 신 같은 연예인 취급을 좋아하는 흑인들이 있었지만, 상당한 다수는 낯선 사름들의 생에 대한 문제들이나 낯선 사람들이 자기한테 뭐를 원하는 것과 관련된 끊임없는 부담을 싫어했었으며 그냥 평화롭게 살고 싶어 했었어요. 또한, 어떤 권위가 있었을 때 뭐가 잘 안되어서 조용히 죽었을 때까지 자기 자신만 탓을 했었으며 다른 사람들의 생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권력을 가지는 것 조차를 애타게 후회하게 되던 흑인들이 있었고요. 이런 흑인들은 [현재의] 아프리카이라는 대륙에서 여기저기에 위치하던 왕국들에 살고 있었을 수 있었던 건데 (예: 이집트나 누비아), 그들 중에 많은 사람들은 왕국에서 떠났었고 다른 데 살러 갔었죠 (**유대인들과 기독교인들에 대한 말: 이집트의 경우에는 흑인들을 이집트를 떠나는 진짜의 대규모 이동이었다. 그 두가지 동화책들의 언급된 “출애굽”은 그냥 대대로 물려주는 소설 뿐. 여기에는 유대인들과 기독교들을 창피하게 만들고 싶었지만 다수는 창피한 줄을 모르니까 시간 낭비만이겠다고…**). 어쨌든, 이 이동하는 흑인들 중에는 “아프리카” 대륙에 위치한 자기의 조상 부족에 살고 있었던 위치로 돌아가는 사람들이 많았을 수도 있겠죠. 많은 백년 후에는 이 사람들의 후손들이 납치되어서 팔게 되는 후에 (아프리카에서 팔았게 되었지만 직접 ‘최고의 창백한 놈들’에게 직접 납치를 당하기도 했고) 강제로 다른 대륙들로 이동시켰죠 (백인들한테 흑인들이 사람으로 안 보여서 일부러 ‘데리다’를 쓰지 않았다.) 당연히 미국이 포함이었고, 이 흑인 후손들은 제대로 섞게 되어 있으며 현재 모든 미국계 흑인들 중에 흑인이 아닌 사람들 (또다시, 특히 또 특별히, 백인들)이 공공연히, 또, 의식적으로 자기가 흑인이다는 이유만으로 자기(의 흑인 조상)를 숭배하는 무의식적인 기억들 때문에 진정하고 참된 자유의 공포증을 겪고 있는 흑인들이 상당히 많아요. 이 현실로 인해 많은 흑인들은 권력이나 권위 있는 위치는 단순히 원치 않는 거 아니라 능동적도 무의식적으로 그런 걸 피하는 것까지 하고 있고—심지어 자기의 타고난 실력과 권능을 스스로 또 저절로 억누르기, 또 다른 타고난 실력이나 권능을 억누르지 않은 흑인들을 비난하고 욕하기까지 하는 흑인들이 있어요. 왜냐하면 이 흑인들은 결국 무의식적으로 그 때와 같지 않게 부담 없이 그냥 친구들과 모든 다른 어울리는 사람들이랑 단순하고 평화롭게 살고 싶어 해요. 그렇기는 한데, “그 때”가 실제로 끝나지 않았어요. 단 숭배 방식은 바뀌게 되는 것 뿐이죠 (이미 말했는데…아주 복잡하고 긴 이야기/설명이니까, 다음에). 예를 들자면 미국에서 거의 모든 “선의적인” 백인들은 그 자기가 아는 한 주변 흑인을 계속적으로 연락해서 인종차별주의를 극복하는 법을 가르쳐줘 달라고 하곤 해요…흑인들이니까 이것은 반드시 해야 할 의무이다 생각하면서.
흑인들의 입장에서 이런 자격 의식은 백인들의 삐뚤어진, 흑인이 자기가 무엇을 못 하는 것을 할 수 있거나 모르는 것을 알고 있다면 흑인들이 자기 (백인들)를 위해 태어날 때부터 죽을 때까지 언제나 대기 중이어야 살아야 한다는 믿음에서 초래되는 거예요. 그래서, 상당히 많은 흑인들은 무의식적으로 이런 끔찍스럽고 끝이 없는 악몽 같은 인생을 방지하려고 살고 있죠. 어떤 식으로 신 취급을 받는 사람이 되면 그런 자격 의식은 불가피하게 된다는 말이에요. 이런 현실을 잘 이해하고 알고 있으니까 제…뭐랄까…뛰어난 독특성[이라고 부르자] 때문에 당신 병맛 사람들과의 선택한 소통하는 방법은 “비정상”이죠. 그래서, 직설적으로 말하면, 제가 일을 이렇게 하는 이유는 제가 무엇을 감당하지 못하겠다는 거 아니라, 당신 매달리는, 자기가 원한다면 다른 사람의 관심을 받을 작격이 언제든지도 얼마든지가 있다고 생각하는, 죽도록 정서적으로 굶주리는, 강박적/스토거 같은 행동을 하는 강한 경향이 있는, 가학성 쾌락주의자인 맹추들이 감당하지 못할 것 말이죠. 제가 당신들의 어리석음에 제 건강과 웰빙을 위해 절대적인 필요한 정도의 에너지보다 더 이상의 에너지를 절대로 쏟지 않을 거예요. 그런 사회적으로 구성된 시간이 없거든요! 응, 당신도 포함. 넌 특별해서 예외가 될 수 있는 사람 아니거든! 아무튼, 흑인들이 자기 자신의 선처적인 실력과 권능에 대해 인식해서 배워햐 하고 그것을 인정하며 받아들이고 양성하고 개인적인 경계를 설정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것은 누가 뭘 하든, 무슨 일이 있어도 흑인들은 이런 일에 대해서 조금이라도의 미안한 마음이나 죄책감을 갖지 말아야 한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이런 자기 자신의 실력이나 권능을 인정해서 받아들이는 공포함과 권위 있는 사회적인 지위들에 대한 무의식적인 우려가 흑인 남성들보다 흑인 여성들에 명백하게 강하는 거죠. 일반적으로, 즉, 인종/민족성에 상관없이, 남성들의 에고 (자만심) 때문에 그에 대응하는 여성들보다 칭찬을 더욱 더 욕구하고 갈망하며 본인이 무슨 좋거나 다른 사람(들)에게 유익해 보이는 일을 하고 날 때 (또 다른 사람이 하고 날 때) 가능한 많이 사람들이 자기가 했다는 것을 알리고자 하는 충동과 불후의 명성을 남기고자 하는 욕망이 많이 더 강하죠. 한편에는 그에 대응하는 여성들은 그룹의 웰빙에 신경 많이 더 쓰이고 주의하는 경향이 있어요. (이것 때문에 역서를 기록하는 자들이 거의 다 남성들이죠.)
그 계시적인 이야기를 제공하는 것에 대해 고맙다는 말을 안 해도 돼요. …전 당신의 마음을 다 알고 있으니까.
한 유명한 흑인 민권 운동가 (Fannie Lou Hamer)가 말씀하신 대로: ‘모두가 [진정하고 참된] 자유를 느낄 수 있을 때까지 아무도 [진정하고 참된] 자유를 알지 못한다 (“nobody’s free until everybody’s free”)’. 전 이제 인내력이 얼마 남아 있지 않거든요. 내 자유를 “언젠가”나 “훗날에” 원하지 않고, 난 내 자유를 지금 원해, 이 빌어먹고 있는 새끼들아!! 다른 사람이 꿈꾸는 자유도 아니고, 다른 사람이 정한 원칙이 있는 자유도 아니고, 나의 자유. 그래서, 당신들에게 이 최후통첩을 전달하겠습니다: 내 자유를 내가 원하는 대로 내놔, 아니면 날 영원히 보내줘라. 이 세상은 절 가질 자격이 없고 저라면 이 세상에 사슬로 묶는 것도, 이 세상에서 사슬을 묶는 것도, 말도 안되게 과분하죠. (단어를 고의로 선택하는 거니까 이에 대한 뜻을 잠깐 생각해보세요. 힌트: 이것은 제가 언급했던 “어둠”과 관련된다. 그거 아냐, 이 병맛 놈들아. 누구나 의식적이나 의도적으로 제게 해를 끼치는 것은 금지되는 뿐만 아니라, 아예 하지 못하고요—당연히 제가 포함된 거예요. 제 죽음이 평온할 거예요.)
이 포스트의 글을 다 요약하자면, 제가 이세상에 사는 생물 누구보다 훨씬 더 이기주의적이에요. 맞아요! 모든 것을 저만의 생각을 해서 한다! 어허허! …단, 당신들과 다르게 제가 전혀 개인주의적이지 않아요. (방금 뿅가게 만들었죠? 맞습니다, 이기주의적인 사람은 동시에 사심이 없는 사람일 수 있어요.)
마지막으로 제가 아주 중요한 경고를 발표하는 것으로 이 공익광고를 끝내고 싶어요. 있잖아요, 이제 저에 대한 진실을 알려지는 것을 봐서, 저의 이렇게 익명으로 하는 개인적인 이유를 갖으며 절대적으로 용납하거나 넘어가면 안 돼는 역겨운 짓을 하려는 심리 조작과 사람 조종을 하기 좋은 포식성이 있는 사이코패스들 (즉, 누가 뭘 하여도 공감을 할 수가 전혀 없는 가해자인 초민감자들; 안티 엠패스, anti-empath이라고 부를 수 있는 (거의 다) 백인들)은 생기게 될 거예요. 이런 특별한 사이코패스한테는 제 이유가 새로운 무기로 보이니까요. 어쨌든, 이런 사람들을 믿는 것을 권고하지 않습니다. 환언하면, 하지마! 함정이다! (그 동안 이 구절 읽고 싶어 했지?)
이제 제목을 이해하는 거예요?
오, 이것은 주요 주제과 관련되지 않지만…
어떤 못되거나 불쾌한 짓 (등)을 하게 된 사람들 중에 진짜로, 정말로 조금이라도 가책을 느끼지 않는 사람들은 당신이 인정하고 싶어 하는 정도보다 훨씬 많죠. 그래서, 모든 세상의 사람들은 이제 (되도록 빨리) 이런 사람들이 사과하게 되는 것을 그만 (어떤 식으로든) 강제해야 해요. 대신, 그 아주 중요하고 노출되는 정보를 소화하고 있는 관계를 그 현실과 그 자기과의 개인으로서의 관계에 따라 정리하거나 조정해야 돼요. 안 그러는 경우에는 (즉, 보통과 “정상적인”경우에는) 품행장애를 양성하게 되는 뿐만 아니라 해로운 소시오/사이코패스적 행위를 활성화하는 거예요. 이런 권고는 지금이야 바로, 될 수 있는 대로 빨리, 모든 아이들에게 필수적으로 적용해야 돼요. 이렇게 사회가 좋게도 옳게 변할 수 있죠. 하게 되면 사회가 다음과 같은 3가지 개선점이 생길 거예요: 1) 만회할 수 없는 손해/피해를 끼쳐 격심한 트라우마를 줄 수 있는 능력을 선천적으로 갖는 소시오/사이코패스들이 이러한 손해를 끼칠 수 있기 전에 그런 사람들을 알아볼 수 있게 된다. 2) 그런 성향/경향과 행위가 (사회적으로) 실제로 괜찮고 용인한 것이라는 메시지를 더 이상 전달하지 않게 되니까 그런 것을 더 이상 양성하지 않게 된다. 3) 아이들한테 이 세상에서 자기에게 해를 끼치며 자기가 아프게 되든 말든 전혀 상관하지 않은 사람들이 많으니까 자기위안/자기달래기에 도움이 되는 건전한 방법(들)을 찾아서 진전시켜야 한다는 것, 또 이런 일을 당할 때 진짜로 자기의 물리적과 정신적인 건강과 웰빙을 지키고 싶어 하는 사람(들)을 찾아서 기대해야 하는 현실을 가르쳐주게 된다. 현대 사회의 이중성, 부정직함과 가식적인 공손함,“나는 좋은 사람이다”라는 개뿔은 당신들 논리를 반대하는 새끼들의 가장 큰 문제이죠. 한 시나리오를 통해 이 변경의 중요성과 필요성을 더 효과적으로 전달하고 강조해보자:
어떤 어린 아이가 갑자기—아무나 논리적인 이유 없어 보이게—한 줌의 움켜쥐던 흙을 다른 어린 아이의 눈에 일부러 던진다 (제가 직접, 제 두 눈으로, 이것을 본 적이 있다). 물론, 방금 눈에 흙이 들어가게 되는 어린 아이가 울게 될 거죠. (성인들이 두 명이었으면 이상적이겠지만…한 명이 즉기 그 조기에 있는 흙을 던지는 작은 사이코한테 다가가고 다른 성인은 곧바로 그 안타까운 대상자인 어린 아이한테 다가간다.) 돌봐주는 성인이 방금 테러를 당한 아이에게 접근해서 흙 빼내기를 도와줘야 한다. 아이가 적당히 진정해지는 후에 그 조기에 있는 작은 사이코를 테러를 당한 아이의 앞에 데려오고 (무조건 당한 아이를 자기를 아프게 만드는 아이 앞으로 데려가지마). 그 땐 (즉, 당한 아이 앞에) 돌봐주는 성인은 침착하게 초기단계의 사이코 아이한테 [그 다른 아이의 눈에] 흙을 던지는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있냐고 물어봐야 한다. 만약에 대답은 ‘아니요’/‘없어요’이면, 돌봐주는 성인은 침착하게 왜 했냐고 물어봐야 한다. 왜 했는지를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수도 있는데 (당연히). 그래도, 그 아이가 정말로 왜 자기가 그것을 했는지를 모르면 그 때부터 생각보다 긴 시간 동안 자기가 했던 일을 말 없이 깊이 생각할 것이다. 아무튼, 그 다음에 돌봐주는 성인은 초기단계의 아이한테 침착하게 왜 자기가 했던 일이 괜찮지 않고 옳지 않다는 것을 해명해야 한다. 그 후에 테러를 당한 아이를 조용한 곳으로 데려가서 ‘나쁜 일을 하고 사람을 일부러 아프게 하는 사람들이 있고. 이런 사람들 중에 왜 자기가 다른 사람을 일부러 아프게 했는 지를 모르는 사람들은 있고, 또, 조금이라도 미안하지 않은 사람들도 있다’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 계속해서 전달해야 하는 것은 어찌되든, 자기를 그렇게 아프게 하는 것에 진짜로 미안하지 않은 사람들이랑 (아주 중요한 것: “사람들”을 꼭 말해야 되고, “아이들” 말하지 말고) 놀지 않아도 되는 것 뿐만 아니라 놀지 않았으면 한다는 것 (즉, 그런 사람들을 가까이 하게 하지 않게 하고, 또, 멀리해야 된다)을 전해야 한다. 그렇지만, 뭘 해도 돌봐주는 성인은 무조건 자기를 일부러 아프게 하는 아이의 벌에 대한 말을 하지 말아야 한다. 왜냐하면 아직도 어리뻥뻥하는 아이 아니고 초점을 다른 데로 돌리는 거고, 더해서 이럴 때 그런 ‘너를 아프게 하는 애가 벌을 받을 거’라는 이야기는 자기를 아프게 하는 사람(들)이 벌을 받는 것을 꼭 자기의 두 눈으로 보거나 어떤 식으로 확실히 알게 되어야만 괜찮을 수 있는 (즉, 마음이 편해질 수 있는) 필요성을 양성하는 것이다—굵은 단어가 굉장히 중요해요, “봐야만/알게 되어야만”. 그것이 바로 불건전하니까. 그 다음에 그 돌봐주는 성인은 그 아이가 있을 수 있는 그 사건에 대한 질문(들)을 진심으로 솔직히 대답하려는 마음으로 아이한테 자기가 했던 말을 이해했는 지를 물어봐야 하고. 그리고, 그 아이한테 자기가 믿는 사람한테 언제든지 갈 수 있고 자기를 아프게 하는 사건을 이야기하여 당해서 기분이나 마음이 어떻게 되었는지를 말해줄 수 있다는 것을 전해야 한다. 그걸로 끝내야 한다. (그 아이가 자기를 테러했던 아이는 어떻게 되겠냐고 물어보는 조건하에서만 돌봐주는 성인은 자기를 아프게 하는 아이가 자기를 아프게 하는 것처럼 다시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지 않게 필요한 도움/지원을 받도록 하겠다고 하면 된다. 바로 이 후에 돌봐주는 성인이 ‘지금 제일 중요한 것은 본인 (테러를 당했던 아이)이 관찮은 것이다’ 전해야 한다.) 또한 굉장히,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정도로 중요한 것은 당했던 아이가 더 이상 분명히 속상하지 않을 때, 또 위에 성인과 아이의 대화가 끝났을 때까지 그 두 아이 사이에서 스킨십은 무조건 노노.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돌봐주는 성인이 두 아이를 포옹시키는 것은 안돼, 또, 무슨 일이 있어도, 뭘 해야 해도, 그 돌봐주는 성인은 그 초기 단게 작은 소시오/사이코패스가 본인이 일부러 아프게 했던 아이에게 손대지 않게 해야 한다. 이대로 당했던 아이가 속상할 때나 마음을 편안하게 하려고 할 때 다른 사람(들)이 의존적으로 필요하지 않게 성장될 거니까 소시오/사이코패스들의 대상자가 되지 않을 건다. 즉, 감정 조종하는 소시오/사이코패스와 공동 의존적인 관계에 관여하게 될 확률이 보통보다 훨씬 더 낮을 거예요.
그 작은 초기 단계 소시오/사이코패스에 대해서, 당했던 아이가 보이지 않은 것에서 그 돌봐주는 성인이 어떤 적정한 “벌”을 주어 수행해야 한다. 예를 들어, 그 작은 초기 단계 사이코한테 누군가가 흙을 자기에 얼굴에 던졌으면 괜찮겠냐고 물어보라. 그 다음에 어려서 아직 쓸 수 없다면 어느 사람이 자기의 얼굴에 흙을 던지는 것과 그 일로 인해 기분이 어떻게 되겠는 그림을 그리려고 (‘다른 아이’를 말하지 않은 것이 중요한다. 그림은 통찰력이 돋보이는 그림일 수 있으니까) 혼자서 구석으로 보내야 한다. 그림을 제대로 다 그리는 후에 그 아이가 돌봐주는 성인한테 그림을 설명해야 한다. 그 다음에 돌봐주는 성인은 만약 자기가 흙을 던져서 다른 아이를 아프게 하는 것에 대해 미안한 마음이 나중에 생기게 되면 그 당했던 아이한테 가서 알려줘도 된다고 전해야 한다. 그 초기 단계 사이코패스가 쓸 수 있다면, 연필과 종이를 쓰는 것으로 (타자를 치지 못하게…벌이지) 어느 사람이 자기의 얼굴에 흙을 던지는 것 대신, 누군가가 자기를 진짜로 아프게 했을 때와 그로 인해 기분이 어땠는지를 쓰게 해야 한다 (이 때도 “아이”를 하지말고). 끝내서 돌봐주는 성인 앞에서(만) 낭독하게 해야 한다. 그림이든 집필된 과제든 설명/낭독이 끝나고 나서 돌봐주는 성인은 본인이 그 아이를 아프게 했으니까 자기랑 다시 놀고 싶지 않아 할 수도 있으며 그것은 그 아이의 선택이니까 자기가 이해할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설명해야 한다. 이렇게 해야 둘 다 아이들이 다른 사람을 아프게 하는 사람이 그 아픔의 대상자보다 관심을 받는 것을 보기에는 어느 쪽의 미개발이나 잠재적인 소시오/사이코패스적인 행동이나 품행을 무의식적으로 북돋우지거나 격려하게 되지 않을 건다. 더해서, 그 해를 끼치는 아이가 다른 사람들을 아프게 하는 벌은 결국 혼자가 되는 것이라는 교훈을 줄 수 있게 된다. 또한 좋은 점은 이제 그 그림/집필된 과제가 그 조기에 있는 소시오/사이코패스의 부모/주호자(들)이 아동 심리상담자에게 보여줄 수 있는 중요하고 유용한 것이 될 수 있는 거죠. 다른 한편에 동정 구하기에 더 많은 관심을 받을 수 있거나 다른 사람들을 조종할 수 있게 자기 피해자인 척을 하는 (너무 한심하고 파렴치해서 거짓말까지 하게 만드는) 잠재적일 수 있는 소시오패스적인 경향도 무의식적으로 북돋우지거나 격려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돌봐주는 성인이 당했던 아이의 있을 수 있던 오버하는 정도로 (그런 애들이가 충분히 있다는 걸 인정해라) 응석을 받아주지 않았고, 또 과잉보호하지 않았다. 이대로 둘 다 아이들이 그 사건에 대해 받았던 존중과 관심이 알맞았다는 기분이 들게 될 것. 그리고, 형제자매를 위한 예외는 절대적으로 없어요. 소시오/사이코패스적인 행동이나 성질/성향을 격려하거나 양성하는 것은 항상, 언제나,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적으로 하지 말아야 하는 일이에요. 경고 신호들이나 소리없는 아우성 (특히 아이들한테서)을 혈연이나 어떤 삐뚤어진 “충성심” 때문에 무시하면 안된 다는 말이에요.
…그렇게 하는 거…아니, 그렇게 해야 하는 거죠, 애들아. 헐~, 내가 모든 그리 명백하게 분명하고 간단한 것을 이렇게 공들어 안간힘을 써서 시시콜콜히 설명해야 이 독크림 도넛인 퇴폐적인 숙맥들이 이해할 수 있지. 내가 주고 주고, 또 주고..내 ROI가 어디에, 즉, 내 투자 이익율은 어디에 있겠지?..어디냐고?!? 난 그냥 단순히 내 건강을 지속적으로 증진하게 해주는 지식과 기술들을 얻으면서 똑같은 걸 진심으로, 또 진정으로 구하고 있고 원하는 사람들을 찾으면서 내 유일무이한 역량을 통해서 도움이 되고 싶은 뿐인데, 이 떨어뜨리던 품질과 특권의식을 가진, 자기 도취증에 빠진, 배은망덕한 가학성 쾌락주의자들이 그냥…아니…됐다. 진이 다 빠졌네요. 이제 현재의 건강 수준을 적어도 유지할 수 있도록 착취를 당하러고 가야죠. 이 사람을 죽고 싶게 만드는 질리는 인간들. 끝이요.
다음 쓸 때까지…?